알레고리를 창출하려는 충동 Allegorical Impulse : Toward a Postmodernism
크레이그 오웬스 Craig Owens
크레이그 오웬스 Craig Owens (1950~1990)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비평가이자 게이 활동가이며 페미니스트로서 최근의 미국 미술의 동향을 이론적으로 구명하려고 시도하는 미술 비평가 <Art in America>지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October>지의 편집자를 역임한 바 있다. 하버포드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와 버나드 대학의 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사진,페미니즘,게이정치학,미술 시장, 정신 분석학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문을 저술하였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본문 ‘알레고리를 창출하려는 충동’을 통해 과거 모더니즘 시기 배척당했던 알레고리의 의미와 새로운 이해를 말해 준다. 알레고리가 최초로 배척당한 때는 언제였는가? 비평 계에서는 알레고리를 억압한 것은 모더니즘이 무비판적으로 전수받았던 낭만주의 예술론이 남긴 유산이다라고 본다.
미술에서 알레고리가 소멸의 길로 접어든 것은 대체로 알레고리가 역사화와 결합하게 된데서 찾아진다.
그리하여 쿠르베가 현대성을 위하여 알레고리를 구제하려고 시도하던 그때까지 알레고리와 현대성을 서로 분리시키는 경계선이 명백하게 그어졌으며, 그리고 ‘그 시대에 속하여야 한다. Il faut etre de son temps’는 모더니즘의 신조에 대립되는 명제로 파악된 알레고리는 역사화와 더불어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우울에서 자양분을 취한 보들레르의 천재성이 알레고리적인 것이었다’고 본 벤야민의 통찰력은 알레고리적 충동을 미술에 있어 모더니즘의 근원지로 보았으며 그리하여 모더니즘 작품들을 이리저리 교차하는 식으로 해독해 낼 가능성, 다시 말하여 작품들의 알레고리적 차원이 충분히 인식되는 식으로 해독해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상의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원칙적으로 모더니즘과 알레고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오로지 이론에 있어서만 알레고리가 외면당하여 왔다는 점이다.
현대 예술에 대해 알레고리적인 동기를 용인하는 일은 바로 금단의 영역을 파고들어가는 모험으로 여겨진다. 거의 2세기동안 알레고리는 미학적 일탈의 현상이자, 예술과 정반대의 명제로서 부상해왔기 때문이다. 크로체는 자신의 저서 <미학>에서 알레고리를 ‘과학 아니면 과학을 흉내내는 예술’로 지칭하였고, 작가 보르헤스는 미적인 과오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현대문화의 다양한 측면들에서 뚜렷한 알레고리적인 충동이 거듭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본문을 통하여 미술의 실제와 비평에 대한 알레고리의 영향을 통하여 이러한 조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예술에 등장한 알레고리의 전체역사를 개관하면, 알레고리적인 재해석이 없다면 배척되었을 과거와 현대의 틈 사이에서 기능하여 왔다. 과거가 멀리 동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런 과거를 현재를 위하여 되살려놓으려는 욕구, 이 두 가지는 알레고리에서 보이는 가장 근원적 충동에 해당한다. 현재 현대 문화의 다양한 측면들에서 뚜렷한 알레고리적인 충동이 거듭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즉 그것은 벤야민에 대한 재조명이나 해롤드 블룸의 저작 <불안한 영향력 The Anxiety of Influence>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오늘날 건축 실무를 특징지우는 역사적 복고주의 조류에서나 최근의 예술사적 담론에 함축된 수정주의적 태도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우선적으로 알레고리를 현대 미술에서 실천한 선구자들 가운데 마르셀 뒤샹이 있다. 뒤샹은 <대형 유리>라는 작품의 ‘순간적인 정지상태’와 ‘초고속 노출’을 ‘알레고리적 현상’과 동일시 했다. 알레고리는 예술적 기법이자 예술적 태도이며, 예술적 과정이자 예술적 수용 활동이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텍스트가 또 하나의 텍스트에 의해 중첩되는 모든 경우에 발생하는 그런 것이다. 노드릅 프라이에 따르면 알레고리적인 작품들은 작품 자체에 대한 주석의 방향을 미리 규정하는 경향을 띈다. 알레고리가 단지 어떤 작품에 대하여 사후에 첨가되었을 뿐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공박을 받을 적마다 상기되는 것은 알레고리의 이러한 텍스트 초월적 metatextual측면이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적인 작품에 대해 적용되는 패러다임은 바로 (수정한 자국이 역력한) 거듭 쓴 양피지라고 이야기된다. 이는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주석과 비평의 과정이 포함되는 한 알레고리는 모든 주석 및 비평의 기준이 되는 모델로 되며 알레고리적인 이미지는 적절히 각색된 이미지로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차용된다.
알레고리와 현대미술이 형성한 최초의 연계성은 이제 트로이 브라운투흐 Troy Brauntuch, 세릴 레바인 Sherrie Levine,로버트 룽고 Robert Longo및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의 차용 현상을 근거로 마련될 수 있다. 이들 미술가들은 다른 이미지의 복제를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브라운투흐의 이미지들은 의미에 대한 약속을 보증하는 동시에 유예한다. 그가 안출해내는 이미지들은 암호처럼 해독되어야 하는 마술적 문자나 파편들과 같이 기묘하게도 미완성적인 것으로 출현한다. 알레고리는 이와 같이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미완성의 것과 끊임없이 친근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특성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은 유적에 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알레고리와 현대미술이 갖는 두 번째 연계성이 드러난다. 작품이 그 설치된 환경과 합치되면서 현저히 드러나는 장소적 특성이 그것이다. 유적들과 더불어 그 신화적 특성이 드러나는 아울러 로버트 스미드슨을 포함한 대지미술 작가들의 작품들에서는 일시성, 모든 현상들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대지미술은 20세기에 출현한 죽음에 대한 상징물 memento mori이다. 일시적인 까닭에 이런 작품이 사진으로서만 남겨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사지의 알레고리적 잠재력을 시사한다. 벤야민의 말대로 “사물의 일시성을 올바르게 평가하여 사물에 영원성을 보장해주려는 관심은 알레고리에 있어 가장 강력한 충동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카알 앙드레 Carl Andre나 트리샤 브라운 Trisha Brown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다음에 다른 사물’이 단순히 배열되는 병렬과 누적의 전략을 취하는데 여기서 현대미술과 알레고리의 세 번째 연계성이 드러난다. 이와 연관하여, 알레고리적인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은 수학적인 순열이다. 알레고리는 언어의 은유적인 축을 언어의 환원적인 차원에다 투사하는 그런 것으로 드러난다. 알레고리는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포괄하며, “사실주의나 낭만주의, 운문이나 산문 모두에서 똑같이 가능하다. 알레고리는 가장 객관적인 자연주의를 가장 주관적인 표현주의로, 가장 확고한 사실주의를 가장 초현실적으로 장식적인 바로크로 전환시킬 능력이 있다. 양식이나 장르를 엄격히 구분하는 미적 범주를 대담하게 무시해버리는 이런 성향은 알레고리가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사이에 설정한 상호관련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노출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차용, 지형적 특성, 일시성, 누적, 추론적 성격, 잡종교배 이들 다양한 전략들은 현재의 미술이 갖는 특징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며, 바로 이들 전략 때문에 현재의 미술은 모더니즘 작품들과는 구분된다.
현대 미학에서 알레고리는 어김없이 상징에 종속되는데 상징과 본질이 동일하다는 근거하에서 상징은 예술적 직관의 표상으로 화한다. 코울릿지는 “알레고리는 의도적(의식적)으로 말하여진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반면에 상징에 있어서는 표상된 일반적 진리가 예술가가 상징을 지어나가는 동안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상징이 동기 부여된 기호라면,그 반대의 것으로 이해되는 알레고리는 임의의 것, 인습적인 것, 동기 부여되지 않은 것일 것이다. 타당성이란 미명하에 그리고 예술 작품의 직관적 성격을 보존할 목적에서 알레고리는 보충물로 이해되었다. 작품에 그냥 덧붙여진 것으로 파악되는 알레고리가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유리될 것은 뻔하다. 이런식으로해서, 작품을 알레고리적으로 만드는 것이 간과된다는 조건하에서 모더니즘은 알레고리 작품 자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폴드만은 그의 저서 <읽기의 알레고리>에서 ‘해독 불가능성의 알레고리들’이라 지칭하며 알레고리를 언어의 두 가지 별개의 용도나 층위(직설적인 용도, 은유적-수사적 층위)가 구조적으로 상호개입,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알레고리는 언제나 은유의 알레고리이며, 그에 따라 항상 알레고리는 독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알레고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작품에 내재하는 구조적 가능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알레고리는 더 이상 예술 작품에 단순하게 부가된 그 어떤 것으로 힐 날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더니즘에서 알레고리는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의 예술 경험을 시각적인 것으로부터 텍스트적인 것에로 변모시키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 활동을 우리가 후기 모더니즘의 문턱에서 만난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후기 모더니즘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뒤샹의 모든 작품에 인칭상의 변화가 특징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이런 이행 사실 자체는 바로 ‘언어 기호의 파기…의미와 연관된 엄청난 자의성을 알려준다고 언명하였다. 뒤샹의 모든 작품은 관람자에게 전술되는 메시지들로 판독된다. 이외 연관하여 우리는 알레고리가 빈번하게 관람자에게 무엇으로 권고하는 성격을 취하며, 그리고 알레고리는 관람자를 조종하거나 그의 행동을 개조시키려는 시도로서 관람자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야기로부터 강론에로, 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이행하는 경향은 의미심장하게도 후기 모더니즘예술이 독자/관람자에게 부여하는 중심성을 해명해준다. 텍스트와 읽기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어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것이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하는 기점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디를 지향하는가 하는 지향점에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1959년에서 60년사이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알레고리’라는 제목의 콤바인 회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유일한 은유는 쓰레기 하역장을 암시하는 은유이며 스타인스버그는 이 작품을 ‘쓰레기장, 저장소, 하역장’으로 평하였고 크라우스는 “이 작품의 화면은 그런 부류의 균등화가 일어날수 있는 장소 현장이라는 사실이 생겨났다”며 스타인스버그와 크라우스는 모두 이 작품이 인간의 마음과 유사함을 보여줄 목적에서 이 작품을 묘사해 나간다 라고 인식한다. 그리하여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의식 또는 무의식의 알레고리들이 된다.히틀러의 소묘화를 재생한 트로이 브라운투흐의 작품들에 대하여, 작품의 연유를 알려줄 제목이나 확인 사항을 결여하였기에 이들 작업은 묵묵부답의 상태로 존재하고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브라운투흐가 실증하기 시작하는 바는 바로 그 불투명성이며 그리고 바로 이점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알레고리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한 알레고리의 비밀을 푸는 데 필수적인 열쇠를 우리가 획득할 지 말 지의 여부는 순전히 운에 좌우된 문제이며 이 사실은 그의 작품에다 그의 활력의 원천이기도 한 부인될 수 없는 파토스를 부과한다.
보르헤스가 알레고리를 ‘시시하고 하찮은 것으로 괄시한 반면에, 롤랑 바르트는 알레고리의 시시한 속성이 바로 알레고리에 잠재한 ‘진실’에 대한 징후로서 기능한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알레고리 도식에서 의미의 첫 번째 층위는 정보제공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며 동시에 사실에 충실한 성격을 띈다. 두 번째 단계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바르트는 이것을 신학과 연관시켜 명료한 것으로 간주한다. 앞의 두 단계와는 다르게 의미의 세 번째 단계는 ‘무딘 obtuse’의미를 갖는데 “무딘 의미는 씨피니에 없는 씨피니앙이며, 그러기에 이 의미를 명명하는 데는 난점이 따른다. 라고 서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의미는 변장과 관계 있다. 바르트는 이 세 번째 의미를 자체의 책략을 공언하는 분장 및 의상과 같은 별개의 세부사항들과 동일시한다. 분장이나 의상 같은 것들은 이미지를 ‘허구’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세 번째의 무딘 의미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다른 곳에 위치한다. 바르트는 “무딘의미가 제거되어야 의사소통과 의미교환이 이루어지며 순환되며 제대로 수행될 것이다”고 말한다.
스틸을 아무 제목도 없이 그려내는 신디 셔먼의 작품은 모두 자화상이지만 여기서 작가는 언제나 변함없이 위장하여 등장한다. 셔먼이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그림 액자 밖의 불특정의 위협에 대해 불안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그럼으로 서 이야기를 억제하는 동안에 조차 이야기가 드러나게 한다. 이들 스틸은 은유적인 판독을 요구한다. 즉 셔먼이 등장시키는 여성들은 여성들이 아니고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이며, 모방을 고무하는 언론 매체에 의해 투사된 여성상의 거울이다. 셔먼의 스틸은 언론매체가 투사하는 여성들의 이미지에서 추정되는 순진무구함을 해체시켜 놓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해체적 충동은 후기 모더니즘미술 일반의 특징이며 모더니즘의 자기비판적 경향과 구별된다. 후기모더니즘은 피지시체를 괄호 치거나 정지시키지 않으며, 그 대신에 지시활동 자체를 문제 삼는다. 후기 모더니즘 작품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자율성, 자족성, 초월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의 유연성, 미흡성,그리고 초월성의 결여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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