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미학 - 관계적 형태 / 니꼴라 부리오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1965 ~ )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이론가. 2000년에서 2006년까지 제롬 상스와 파리의 팔레드 도쿄의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프랑스 문화부의 예술창작 감독기관장을 맡고 있다. 니꼴라 부리요는 1990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리옹비엔날레등 유럽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하는 동시에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면서, 현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유럽의 큐레이터로 자리 잡았다. 저서로는 <관계의 미학Esthetique relatiannelle>,<형태의 삶 Formes de vie, Une genealogie de la modernite>,<포스트프로덕션 Postproduction>,<래디컨트Radicant>등이 있다.
관계의 미학 - 관계적 형태
니꼴라 부리오는 현대의 예술적인 활동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태와 양상, 그리고 기능이 변화하는 게임이지 불변하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평의 임무는 현재의 그것을 연구하는 데 있다. 라고 정의를 내린다. 모더니티의 미학적 판단 기준들은 여전히 현재의 예술적 실천에 적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은 더 이상 하나의 기준이 되지 못함은 확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 사회의 장champ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파악하는 것과 이미 변화한 것과 변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를 한다.
현대의 예술적 실천과 문화적 기획
20세기는 18세기에 야기된 합리주의적 모더니스트의 개념과 비합리적인 것들에 의한 자유와 자발성의 철학(다다, 초현실주의, 상황주의)들 간의 격돌의 장이 되었다. 이 두개념은 모두 인간의 관계를 형식과하고 개인을 통제하기를 욕망하는 전제적이거나 공리주의적 권력에 대립한다. 솔직히 모더니즘의 계보(근대의 합리주의가 제공한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에서 발전한)에 포함되는 아방가르드는 이제 다른 모든 철학적,문화적, 사회적인 전제들로부터 재구성된다. 오늘날의 예술이 지각적이고 실험적이며 비평적이고 참여적인 모델들을 제공함으로써 이 투쟁은 계속 진행중이다. 모더니티가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고 그 이상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기질이 종말을 맞은 것이다. 현재의 모더니티를 위한 투쟁은 과거와 동일한 관계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예술은 미래세계를 준비하거나 예고해야만 했다. : 오늘날 예술은 가능한 세계를 모델로 지시한다. 결국 현대의 예술 세계는 모더니티로부터 계승된 역사적 발전의 차원에서 미리 고안된 개념에따라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 대신 세상에 더욱 잘 거주하는 것을 배우기로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은 더이상 유토피아적이거나 상상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예술가가 선택한 실존적 현실안에서 존재방식 혹은 행동의 모델들을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예술가는 그의 삶의 맥락을 지속가능한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현재가 제공하는 환경에 거주한다. 예술가는 작동중인 세계를 취한다. 미셀 드 세르토는 "예술가는 문화에 세들어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삶의 변종적인 형태들만큼이나 많은 문화적 대상의 생산과 노동조건에 관련된 예술적 기획을 통해 마우리치오 카틀란식의 표현대로 "달콤한 유토피아"의 시대가 왔다고 니콜라 부리오는 이야기한다.
사회적 틈으로서의 예술 작품
관계적 예술(상징적이고 자율적이며 사적인 공간을 긍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이론적 지평을 인간 상호작용의 영역과 사회적인 맥락으로 삼는 예술)의 가능성은 근대 예술에 의해 제기된 미학적, 문화적, 정치적 목표들의 전면적인 전복에 대한 증거이다. 작품은 이제 경험해야 할 지속적인 시간으로서, 제한 없는 대화를 통한 통로로서 드러난다. 이제 2차세계 대전 말의 비약적 발전 개념으로서의 도시는 물론 도시화에 의한 소유 개념의로서 재량권에 의한 왜곡된 예술작품 개념과는 단절해야한다. 도시는 사회적 상태의 명백한 상징이자 역사적 틀이며 알튀세르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만남의 상태"이다. 이 강렬한 만남의 체제가 문명의 절대적인 규칙으로 작용할 역량에 이르자 그에 상응한는 예술적인 실천들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그 실천들은 상호주관성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예술 형태, 함께하기, 관람자와 회화의 "만남", 의미의 공동체적 구상을 중심 주제로 취하는 예술 형태를 의미한다.
미셀 마페졸리는 이미지의 가상성들 중의 하나는 신뢰에 대한 이미지의 권력이라고 했다. 깃발과 이니셜을 사용한 약호, 도상의 기호들은 공감과 공유을 생산하고 유대적인 관계를 낳는다. 예술은 관계의 공간을 공공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 활동에 비해 즉각적인 담론이 가능한 형태를 띤다. 예술은 어떤 특수한 상호성을 생산하는 장소이다. : 도시가 도모한 "만남의 상태"들의 전체안에서 이 공간이 갖는 지위를 이제부터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적 혹은 물질적 경제의 전체적인 체계안에서 예술 작품의 위치를 재고하는 것은 중요하다. : 우리에게 있어 예술작품은 예술의 상업적 특성와 의미론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틈interstice(자본주의 경제의 틀을 벗어나는 교환 공동체를 부르기 위해 칼 마르크스에 의해 사용)의 전형이다. 틈은 전체 체계에 그런대로 개방적이고 조화롭게 편입되면서, 이 체계 안에서 현재 시행중인 교환의 가능성과는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는 인간관계의 공간이다. 이것이 바로 재현의 교류의 장 안에서 현대미술 전시회가 갖는 성격이다. 사회적 기능의 전반적인 기계화는 점차적으로 관계적인 공간을 축소한다. 현대 예술은 관계적인 영역을 문제 삼으며 관심을 쏟으려 할 때 비로소 정치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업을 관찰해보면 그의 작업은 "사회적 앵프라맹스 infranince social 마르셀뒤샹이 생각한 개념 서로 다른 두가지의 것 사이의 지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 간격, 분리등으로 이해)의 중심에서 행동하는 것이었는데, 일상적 행동이 일어나는 이 미세한 공간은 "거대한" 교환에 의해 구성되고 규정되는 상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의 작업의 사진들은 오늘날 타인들과 맺는 관계들이 형성하는 조용한 삶("still life",정물화)의 증거이다. 예술가가 요구한 관객의 참여정도와 예술작품의 성격, 제안되거나 재현된 사회성의 모델에 따라 하나의 전시는 특별한 "교환의 장"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교환의 장은 미학적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형태"의 일관성과 그것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세계"와 그것이 반영하는 인간관계의 이미지가 갖는 상징적인 가치들을 분석하면서 판단해야 한다. 교류에 기반을 둔 인간의 활동인 예술은 윤리의 대상인 동시에 주제이다. 예술은 만남의 상태이다.
관계의 미학과 우연의 유물론
관계의 미학은 유물론적인 전통에 자리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물론이란 루이 알튀세르가 정리한 것으로서 "만남의 유물론" 혹은 우연의 유물론으로 정의된다. 그 유물론의 세계의 우연성을 그 출발점으로 삼으며 따라서 인류의ㅡ본질은 항상 역사적인 사회 형태 안에서 개인들을 결합시키는 관계들로 이루어진 순수하게 개인-이행적trans-individuelle인 것이다. (마르크스: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이다). 관계의 미학은 어떤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진술을 전제로하는 하나의 예술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형태에 대한 이론이다.
형태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에피쿠로스와 루크레데우스에 의해 시작된 유물론의 철학적 전통안에서 원자들은 허공에서 경미한 대각선을 그리며 평행하게 떨어진다. 만일 이 원자들중 하나가 자신의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것은 "이웃한 원자와의 만남을 발생시키고, 만남에서 만남으로 연쇄 충동, 그리고 한 세계의 탄생을 일으킨다"..이렇게 형태는 그때가지 평행한 두 요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탈"과 우연한 만남으로 태어난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 만남은 지속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세계는 형태안에서 "그 요소들 간에 서로 형성되어야만" 한다. "형태는 지속적인 만남으로 정의 될 수 있다. 만남이 일어나는 순간,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을 추동하면서 "성립된다".이렇게 모든 작품들은 실현 가능한 세계의 모델이 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분리되어 있는 요소들을 서로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앤디워홀에게서 죽음과 미디어의 경우 그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예술작품을 하나의 "정서와 지각의 복합체"라고 정의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술은 개별적 경험들에 연관된 주체성의 계기들을 서로 인접하게 만든다.
한 예술가의 작품은 관찰자-조작자에 의해 재활성와 될 수 있는 일련의 개체적 지위를 갖는다. 이 불안정한 과 다양성의 "형태개념"은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을 "사물들"로 고려하라는 유명한 명제안에서 연장될 수 잇는 관념이다. 형태는 형식주의 미학이 원하는 것처럼 단순히 구성의 부차적인 효과가 아니라 기호의 대상, 형태 행동을 통해 전개되는 경로에 따라 작용하는 기본 원리이다. 현대 예술 작품의 형태는 그것의 물질적인 형태를 넘어 연장된다. 형태는 서로를 잇는 요소이자 역동적인 응집의 원리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선위의 한 점이다.
형태와 타인의 시선
세르주 다네의 말처럼"모든 형태가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이라면 대화의 차원으로 빠져들었을 때 형태는 무엇이 될까? 그 본질에 있어 관계적일 수 있는 형태란 무엇인가? 대체로 형태는 내용에 대비되는 외피로 정의된다. 현대의 예술적 실천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형태"이상으로 "구성formation"에 대해 논해야만 할 것이다. : 양식과 서명안에 스스로 갇힌 오브제와는 상반되게, 현재의 예술은 예술적 제안이 예술적이든 아니든 다른 여타의 구성들과 갲게 되는 능동적인 계와 만남 안에서만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태는 타자로부터 전개된다. 형태는 시선을 통해 우리를 대상화하는 것들과 관련시키는 관계적인 속성일 뿐이다. 예술작품의 형태는 우리가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관념 세계와의 협상에서 태어난다. 그것을 통해 예술가는 대화를 시작한다. 따라서 예술적인 실천의 본질은 주체들간의 관계의 발명에 있다.: 각각의 개별적인 예술 작품들은 공동의 세계에 거주할 것을 제안하는 것일수 있고, 예술가의 작업은 세계-무한하게 다른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관계일 것이다. 예술에 대한 관계주의자적relationniste"이론의 틀 안에서 상호 주관성은 그 "환경"과 "장"을 구성하는 예술 수용의 사회적 틀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실천의 본질이 된다.
다네가 "모든 형태는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이다"라고 설명했을떄 그에게 있어 이미지는 "우리가 부재했던 곳"에 그것이 우리를 위치시킬때나 "타자의 자리를 차지"할 때 "부도덕"하다.이미지 특히 몽타쥬적 이미지 안에서 형태는 욕망의재현과 다르지 않다. : 형태를 생산하는 것은 가능한 만남들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를 수용하는 것은 교환의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다. 형태는 이미지 안에서 욕망을 대표한다. 예술 작품은 신생아가 어머니의 시선을 "바라듯이" 나의시선을 잡으려 애쓴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공동의 삶 la vie commune>에서 사회성의 본질이 어떻게 경쟁이나 폭력보다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의 욕구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었다.한 예술가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줄때, 그는 "나를 바라봐"와 "그것을 바라봐"사이에 작품을 위치시키는 전이적 윤리를 전개한다. 다네의 사유에서 "모든 형태는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왜냐하면 형태는 나에게 그것과 대화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형태는 동시에 혹은 차례로 시간이나 공간에 개입하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