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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미학 - 관계 모니터

louis... 2015. 7. 26. 00:34

 

 

제  목  :  관계의 미학

저  자  :  니콜라 부리오 지음

번  역  :  현지역

출판사 :  미진사

년  도  :  2011. 11

가  격  :  17,800원

 

책 소 개 ㅣ 

1990년대 예술의 경향과 흐름에 대한 니꼴라 부리요의 비평서.

프랑스의 유명한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니꼴라 부리요가 쓴 동시대 예술가들에 대한 동시대적 비평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과 그 경향을 분석하여 90년대의 예술의 형태를 ‘관계’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부리요는 새로운 것을 표방하며 정신없이 달려온 앞선 예술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으며, 새로움의 기준을 넘어서는 예술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철학 사상들을 인용하여 그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지은이 | 니콜라 부리오

1965년에 태어났다. 관계미학 혹은 관계예술 개념을 기반으로 1990년대 이후의 미술을 매개해 온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이론가, 그리고 비평가이다. 프랑스 미술 평단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그는 1999년 파리에 위치한 현대 미술 공간 팔레 드 도쿄를 창립하고, 2006년까지 제롬 상스와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이후 2007년에서 2010년까지 런던 테이트 브리튼의 큐레이터(Gulbenkian curator of contemporary art)로 재직하면서 2009년 테이트 트리엔날레 《얼터모던(Altermodern)》 전시를 기획했다. 2011년에서 2015년까지는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했으며, 최근에는 프랑스 몽펠리에 라 파나세 아트센터(La Panacee Art Center) 예술 감독, 그리고 타이페이와 카우나스에서 열린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바 있다. 부리요는 1990년대부터 베니스 비엔날레, 리옹 비엔날레 등 다양한 맥락의 국제전을 기획하는 동시에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면서, 동시대 미술 담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주요 저작으로는 『관계의 미학(Esthetique Relationnelle)』(1998), 『래디컨트(The Radicant)』(2009), 『엑스폼(The Exform)』(2016) 등이 있다.

 

번  역 ㅣ 

인하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미술사 석사Ma?trise d’Histoire de l’Art와 루앙대학에서 철학 석사Master II de Philosophie 학위를 취득했고, 철학 박사 과정에서 수학했다. 현재는 전시 기획과 동덕여대와 홍익대, 한양대 등에서 미술사와 문화론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미술 계간지 <컨템포러리아트저널>의 선임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독서 노트 ㅣ

관계의 미학  -  관계 모니터

현대 예술과 그 기술적 모델들

모더니스트 예술 이론은 예술과 기술적 수단들이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미학적 질서 사이에 존재 할듯한 확고한 관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관계의 성격에 있어 좀더 제한되고 신중한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 예를 들어 기술과 예술적인 실천들은 언제나 함께 동행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격차는 기술과 예술 중 어떤 것에도 문제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세계는 우리의 눈앞에서 "확장"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적인 능력에 관한 낙관주의는 광범위하게 약화되었다. 우리는 이제 정보 통신 기술과 이미지의 기술 그리고 원자력이 일상적 삶을 향성시킨 만큼이나 위협과 종속의 도구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술과 기술의 관계는 그것이 60년대 가졌던 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이와같은 의미들의 결탁은 영화와 컴퓨터, 비디오와 같이 서로 다른 기술의 등장 효과로 나타나는 인식론적 전복(새로운 지각의 구조)이 그 속성과 잠재성을 통합하는 하나의 형식(모니터, 단말장치) 주위로 합류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술과 자본재 - 탈 지역화의 법칙

미술 사학자들은 두 가지 주요한 장애물에 사로잡혀 있다. 첫째는 예술을 절대적으로 그 스스로의 고유한 규범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자율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이상주의다.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그것은 예술을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중간의 경유지까지 미리알고 있는 기차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둘째는 역사에 대한 기계적인 개념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새로운 기술적 도구가 일련의 사고방식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자동적으로 추론해 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유익한 성찰들은 비평적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채, 새로운 도구에 의해 제공된 가능성들로부터 작업하지만 그것을 기술로서 재현하지 않은 예술가들의 행위였다. 그렇게 드가와 모네는 동시대의 사진 촬영을 훨씬 넘어서는 사진적인 사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는 예술이 그 시대의 기술에 의해 생산된 인간관계와 생산양식에 대해 의식하게 한다는 점과 이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일상에까지 미치는 기술의 영향을 고려하여 예술이 기술을 더욱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예술가에게 이념적 도구로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상되는 효과들을 전망한다는 측면에서만 흥미로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지역화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실재로 재현의 기능은 태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더 이상 오늘날 생산의 조건들을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문제 삼는 것, 그것이 유발하는 사회적 관계를 해독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예술/기술의 관계는 예술 작품의 진동으로서 규정할 수 있는 실행적 리얼리즘에 특히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 실행적 리얼리즘은 응시해야 할 대상으로서 작품의 전통적인 기능과 사회-경제적인 장 안에서의 다소 가상적인 개입사이에서 수많은 동시대적 실천들을 구조화한다. 모더니티의 도전이란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하는 것", 특히 그 시대의 생산방식과 관련하여 적절하고 긴밀한 노동의 태도를 확실하게 창출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모델로서의 기술(흔적에서 프로그램으로)

자본재의 생산자로서의 기술은 생산의 종속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에 비해 예술의 기능은 기술-산업적 복합체에 의해 얻어진 지각적이고 행동적인 습관들을 니체Nietzsche의 표현인 삶의 가능성으로 변형하기 위해 전유하는데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생각하고 살아가며 보는 방식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기 위해 기술의 권위를 전복시키는 것에 예술의 기능이 있다. 단순한 시각적 전염만으로 자가 재생산을 하는 조단테의 그렘린처럼, 이미지는 "이제 스스로 작동한다(세르주 다네)" 현대의 이미지는 그것의 발생적인 능력으로 명확하게 스스로를 특징짓는다. 디지털이미지의 이러한 속성이 강점이 되어 현대 예술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모형이 아니라 기능적인 모델을 제안한다. : 다시 말해 동시대의 예술에 대한 기술의 영향력은 실재와 상상 사이에서, 기술이 한정짓는 범위 안에서 작용한다. 생산 가능성의 경계를 설정하는 컴퓨터와 카메라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 즉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 : 예술가는 이러한 사물의 상태로부터 삶의 방식을 창안하거나 미래 문명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적 행동의 연쇄적 조립라인 위에서 모멘트 M을 자각하게 한다.

 

카메라와 전시   /  전시 - 무대

우리는 근본적으로 현재의 예술이 한편으로는 컴퓨터가, 다른 한편으로는 비디오 카메라가 가능하게 만든 보고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전시가 포함하는 대상에 비해 전시 자체의 지위가 발전한 현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시가 기본적인 개체 구성단위가 되었다는 우리의 가정을 바탕으로, 개별적인 작품들을 감안하지 않고 기술에 의해 도출된 이념과 예술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주제로서가 아니라 행동 도식으로서의 영화적 모델은 60년대의 형태-전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마르셀 브로타스의 실천은 전시 - 상점에서 전시 - 무대의 이행의 증거이다. 예술적인 대상을 기능적인 영역에로 "복권"시킨 것은 브로타스에게 있어 예술작품을 상징하던 "물화의 동어 반복"에 저항하도록 만든 일종의 전복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90년대의 예술적 실천들과 전시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에 오브제가 유지하는 모호함, 이 세대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파브리스 이베르에서 마크 디온까지, 펠릭스 곤잘레스-포에스터에서 제이슨 로즈까지) 에게서 예를 찾을 수 있는 모호함을 예고 한다. 그것은 상호작용과 타자와의 관계를 생산하는 것에 기반한 예술의 지평을 향해 전환하도록 했던 상생과 생산성의 가치에 대해 매우 강조하면서 일종의 "도상학 적 장champ iconographique",정보층들의 전체"로서 기능했다.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예술 작품은 시선으로 둘러볼 수 있는 공간적인 총체로서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관람객들 스스로 이동해야만 하는 부동의 단편 영화와 유사하여 씨퀀스마다 두루 돌아다녀야 하는 경험의 지속으로서 주어진다.  실제로 영화는 어떤 점에 있어 예술에 형태를 부여하는가? 영화는 지속을 다루는 것에 의해 그리고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운동(들뢰즈)"에 의해 형태를 만들어 낸다 : 필립 파레노가 쓴 것처럼 "오브제와 이미지 그리고 전시가 그 안에서 재연될 수 있는 시나리오들과 순간들이 되는 하나의 공간"을 형성한다.

 

단역들

언제가 전시를 가로지른 사람들과 그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상징적/실천적 구조들을 바탕으로 미술사를 쓰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화면에 존재하는 고전적인 형태는 무대를 차지하는 한 명 혹은 다수의 배우들이 참여하는 소환convacation의 형태이다. 발터 벤야민은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은 기계가 관객을 대신하는 특별함을 갖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지의 몽타쥬 작업 과정에서 배우의 몸을 섬세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한다. 비디오는 영화 카메라와 비교하여 인상주의 세대에게 튜브에 든 물감의 발명을 알린 것과 같은 발전을 의미한다. 비디오 그래픽적인 인구의 지배속적인 형태는 표본조사sondage, 즉 텔레비젼 시대으 특징인 군중 속으로 빠져들어 일어나는 우연적인 촬영이다. 카메라는 질문을 던지고, 통행을 기록하고, 인도의 높이에 위치한다. 휴머노이드적인 일상은 비디오 아트를 사로잡는다. 카메라는 개인을 불러 모으는 기구가 되었다. 게다가 비디오는 19세기의 소묘처럼 발견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한다. : 숀랜더스가 자신의 자동차에서 촬영하고, 안젤라 블르흐가 런던에서부터 그녀가 전시하게 될 제네바까지의 여행을 기록한 것처럼 비디오는 예술가들과 동행한다. 제욱시스의 포도는 포스트모던의 새들에게도 역시 푸르다.

 

비디오 녹화 이후의 예술   -   되감기/재생/빨리 앞으로 감기

비디오 이미지 조작의 간편함은 이미지와 예술적 형태를 조작하는 영역에서 나타난다. 비디오 녹화기에 실행하는 기본적인 작동들(뒤로 돌리기, 이미지 멈춤등등)은 이제 어떤 예술가든지 그가 내리는 미학적 결정의 총체를 구성한다. 세르쥬 다네에 따르면,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시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도록하는 잡다한 프로그램표"가 되었고 관객은 스스로 자신만의 경로를 구성할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예술 작품은 전시의 각 경우가 새로이 현재화되거나 재생되도록 책임을 져야하는 물질적인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그 결과 예술은 멈춘 이미지, 고정된 순간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술 작품의 기원이 되는 형태와 행동의 흐름을 말소시키지 않는다. 재연이 가능한 지속에는 예술가들이 자주 귀착하게 되는 비디오의 경우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새겨 넣거나 다른 리듬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비디오는 증거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디오 이미지의예술적인 사용은 개념미술의 증거차원에서 사실에 근거를 둔 확언적 미학이며, 최근의 실천들은 개념예술의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방식 대신에 비디오의 유연하고 객관적인 방식위에서 우리가 사는 "완벽하게 관리되는 사회(아도르노)"를 계속하여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시점의 민주화를 향하여?

비디오 녹화기 이후의 예술은 형태를 이리저리 이동하게 하고, 유려하게 하며, 역사화된 형태를 "재장전"하는 것, 즉 과거의 미학적 대상을 유추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한 점에 있어, 비디오 녹화기 이후의 예술은 영화에 대한 세르쥬다네의 예언을 증명한다. "우리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이 (예술에서)간직될 것이다. 비디오가 누구나 영화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면, 또한 그것은 누구든지에 의해 우리의 이미지가 캡쳐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 도시에서의 이동은 감시하에 이루어지며 문화적인 생산자체도 다른 모든 생산도구에 대한 비디오의 우위와 시각적 도구의 편재를 증명하는 재생/재활용에 종속된다. 이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의 방법은 해방의 도구, 즉 주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도구로서 예술의 미래를 좌우한다. 어떤 기술도 예술에 있어 주체가 되지 못한다: 기술을 그것의 생산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그 사용을 정당화하는 강제되는행동의 외피와 상부 구조와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예술은 오히려 세계와 맺는 관계의 모델이자 모더니티의 의미안에 놓이는 관계의 모델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은 점점 더 걱정스러워지는 사회에서 하나의 첨단기술의 장식적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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