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미술감상, 미술감상학의 제안 : 류지영
제 목 : 커뮤니케이션 미술 감상
저 자 : 류지영
번 역 :
출판사 : 교육과학사
년 도 : 2018 3. 2
가 격 : 15,000원
책소개 ㅣ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미술로 함께 생각하기>이다. 감상자와 지도자를 위한 '소크라테스 문답법'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미술감상을 제안한다. 미학이나 미술사, 미술이론, 미술비평의 관점이 아닌 감상 및 교육의 시각에서 미술 감상자의 탄생을 다루며 감상자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감상을 촉진하는 감상지도 전문가상을 구축한다. 감상자 자신의 체험에 의한 '보기', '말하기', '생각하기'의 단계,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상호 주체인 미술과 감상자. 지도자사이의 복합적 교류관계로 네트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의 미술감상을 구현한다. 그리하여 논리와 직관을 입체적으로 통합하고 미술의새로운 의미와 역동적으로 만나며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예술의 힘과 의미를 재확인한다.
감상자는 미술감상을 통해 자신이 알고있는 것,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항상 새로운미지의 무엇과 만나고 관계맺으며 지와 감성, 경험을 재구축한다.
지은이 ㅣ 류지영
일본 국립동경예대학교에서 미술 교육으로 박사학위 취득후 국립대학교강사와 객원연구원, 미국 애리조나주 교환교수, 일본 정부지원 초빙교수들을 역임하였다.
춘천 교육대학교미술교육과에 재직하면서 현재 한국 조형교육학회 부회장, 한국 초등학교 미술교육협회 이사, 일본 미술교육연합, 세계미술교육학회 등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술감상교육-수업의 구조와 감상의 기술』, 『미술 감상(2011)』, 『꼭 읽어야할 미술교육 40선(2014, 미진사)』등의 공동집필과 번연, 다수의 논문이 있다.
독서 노트 ㅣ
랑시에르 –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게하는 사람, 구하는 자가 길을 계속 가도록 돕는 사람이다.
아서 단토는 미술의 죽음을 ,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저자의 죽음이 이제는 감상자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과 대비되는 푼트쿰에 대해 언급한 바있다. 스투디움이라는 전제되고 코드화된 맥락과 대비되는 푸트쿰은 익숙한 맥락을 깨드리는 이질적인 그 무엇이다. 진부하고 정답으로 전해지는 과거의 무엇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 ‘나’ 자신에 의한 발견으로서 감상을 이루어진다. 이해나 지식, 판단과 평가 혹은 그 근거 등으로 감상자의 경험이 아니라 감상자를 찌르고 관통하는 살아있는 감성에 의한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강렬한 체험이 감상의 본질인 것이다.
감상자의 발견에 의해 미술작품은 완성된다.
우리는 예술의 틀로 세계와 현상을 바라볼때 이전에 간과하던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있다.
예술은 우리의 한계를 확대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며 기존 연구를 보는 시각과 틀을 크게 확장시키게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와 예술에 대한 통찰력을 기반으로 날카롭고 예민한 감수성에 바탕을 두면서 자신의 인식 그 자체를 돌아볼 수있는 ‘되어가는’존재로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자기 인시과 성찰, 그리고 더욱 엄숙한 자기 확인, 그리고 그에 의해 깊은 현상과 세계를 다루는 근원적인 힘으로서 예술에 대한 고찰, 이 모든것이 가능한 것이 예술이다.
감상은 주관적인 관조, 객관적인 감정, 평가나 비판 드의 제 활동이 동시에 혼합적으로 성립되어 대상을 보고 느끼거나 관찰하고 판단하는 종합적 활동이다. 감상행위는 창작 활동처럼 물질의 생산이나 형성에는 관계되지 않더라도 그 내용은 삶의 내면, 세계의 발견, 드러내는 체험과 복합적으로 연결된다. 미술은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접하는가’라는 감각적 체험,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지각과 태도와 관련된다.
현대의 테크놀로지 사회는 글로벌 차원의 인지 자본주의로서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와 과정을 빼앗아버리고 있으며 오늘날 미디어가 요구하는 경험은 깊은 주목과 인식이 아니라 말초적이고 깊이 없는 자극만 넘쳐나고 있다. 사색이 사라지고 검색만 만무하는 시대로 불리는 현재, 비판적 사고와 주체성을 가진 나와 너,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신 혹은 본질을 살려야하는 것이다.
작품의 유희로서 감상이란 모든 미술활동에 있어서 자유로워지면서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이지만 결코 단순한 놀이나 자발적 표출의 과정이 아니라 작품이 전제가 된다. 감상을 통한 대상과의 대화란 ‘다양한 숙고를 통한,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한 통찰, 이며 ‘대화에 의해, 전해지는 것을 자기 것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 ‘우리들의 귀를 듣는 것, 자유롭게 하는 것 이외에 없는 것이다.
미술과의 대화의 장으로서 감상이란 대상 안에 잠재한 진리, 즉 질서의 통찰에 의해 대상이 본질에 육박하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와 기호학에서 주요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논문 저자의 죽음에서 작품의 배후에 저자의 존재를 설정하는 저자 중심의 독해 습관을 비판하였다. 저자=권위의 지위를 상대화하고 읽는 사람을 새로운 쓰는 사람으로 정의하여 그에 따라 독자, 즉 감상자를 창조자의 위치에 놓게 되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저작 열린 예술작품에서 20세기 이후 감상자의 참가를 요구하고 감상자에 의해 완성되어지는 것을 추구하는 작품이 문학 미술 음악,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출현한 것을 보고하고 그 작품들에 대면하는 감상자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역할에 대해서 역설했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은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감상수업은 일방적인 관점의 주입이 아니라 학습자의발견으로 시작되고 생각하기를 배우는 발문과 응답이라는 대화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감상자의 인지능력을 위한 4가지 항목
1. 충분한 시간을 준다.
2. 넓게 대담하게 생각한다.
3. 깊고 명석한 태도로 보고 생각한다.
4. 질서를 만들고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