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의 근원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 사물과 작품 Das Ding und das Werk l Martin Heidegger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 ) : 독일 출신으로서 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독창적인 사상가이며 기술사회 비판가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존재론자였으며 유럽 대륙 문화계의 신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칸트에 따르면, 스스로는 현상하지 않는 사물, 즉 사물자체(Ding an sich)는 예컨데 세계전체이며 심지어 신 자체도 그러한 사물이다. '현상하는 사물만이 아니라 사물 자체와 같이 현상하지 않는 것들 모두가, 즉 일체의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철학용어로 사물이라고 불린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물개념은, 작품이라는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해서 사물이라는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구분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에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사물의 사물성은 사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사물적 존재자에 대한 전승된 해석을 바탕으로 오늘날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듯이, 사물은 그 주변에 속성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은 사물의 핵심(근본)에 관해 말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핵심을 '휘포케이메논'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는 물론 사물의 이러한 핵심적인 것은 언제나 이미 근저에 앞서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징들은 '심베베코타'라고 말해졌는데, 이것은 '그때마다 앞서 놓여 있는것'과 더불어 언제나 이미 드러나 있으면서 그렇게 '휘포케이메논'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이었다.-그리스인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사물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두가지 요소는 본질과 속성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사물의 본질적 요소를 '휘포케이메논'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본질적 요소에 언제나 이미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속성을 '심베베코스로 이해하고 있다. - 그런데 이 언어가 로마시대를 거쳐 현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특히 로마적인 사유는 그리스어를 말하고자 할때, 그 말이 하고자 하는 것의 근원적 경험에 상응하지 않은채 단지 겉으로 드러난 그 말의 피상적인 뜻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서구적 사유의 기반 상실은 이러한 번역오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사물성을 '우유적 속성을 지닌 실체'로서 규정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다지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개념에 의존할 경우에는, 비사물적 존재자에 대해서 사물적 존재자를 대립시키면서 뚜렷이 드러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물 개념이 사물의 사물적 성격에- 즉 자생성(das Eigenwuchsige,자발적으로 자라난다는 점)과 자족성(das Insichruhende,자기 안에 고요히 머물러 잇다는 점)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된다. 통상적인 사물개념은 언제나 모든 사물에대해 적용되기는 하나, 그것은 현성하는 사물을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덮어버리면서 침해한다.
이러한 침해를 피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물에게 일종의 트인곳(ein freies feld)을 마련해 줌으로써, 사물이 자신의 사물적 성격을 직접 나타내 보이도록 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사물은 '아이스테톤'(감각적인 것), 즉 감성적 감관 속에서 감각을 통해 인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의에 따라 그 이후에는 감관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체가 곧 사물이라는 이러한 사물-개념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하였다.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해석의 진리 여부를 충분히 의심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이 사물을 신체로부터 분리시켜 우리와는 너무 먼 곳에 데려놓고 있다면, 두번째 해석은 사물을 지나치게 우리의 신체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 두가지 해석 모두에서 사물은 사라지고 만다.
사물 자체는 '자기 안에 고유하게 머물러 있도록 허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물은 자기에게 고유한 직속적 존립성(Standhaftigkeit)속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물에게 지속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것을 주며, 이와 동시에 감각적 요소를 - 즉 색채, 음향, 단단함, 무거움 등을-야기하는 것은, 사물의 질료적 부분이다. 사물을 질료로서 규정할 경우에는 이와 더불어 이미 형상도 함께 설정된다. 사물은 형상화된 질료이다. 사물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사물이 보임새(에이도스)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우리의 직접적 통찰에 기인한다.
이 사물 개념은 예술 작품 안에 존재하는 사물적 성격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게 해준다. 작품에 내재하는 사물적 성격이란, 명백히 작품을 구성하는 질료이다. 질료는 예술적 조형작업이 이루어지는 토대이자 영역이다. 그러나 질료(재료)와 형상(형태)이라는 이러한 구분은, 비록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된채 사용되고는 있지만, 실은 모든 예술 이론과 미학이 사용하는 단적인 개념 도식이다. 아무런 논쟁의 여지도 없을 만큰 명백한 이 사실은, 질료와 형상의 구분이 충문히 근거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며, 또 이러한 구분이 근원적으로 예술과 예술작품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질료와 형상이라는 이러한 개념적 결합은 예술작품의 작품적 성격과 사물의 사물적 성격 가운데 어디에서 자신의 근원을 갖는 것일까?
형상이란, 질료적 부분이 공간적으로 곳곳에 잘 분배되어 가지런히 배치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어떤 특정한 윤곽을, 즉 어떤 덩어리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말한다.그러나 돌의 경우와 다르게 단지의 경우에, 윤곽으로서의 형상은 질료가 분배됨으로써 그 결과 비로소 생긴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질료의 배치를 규정한다. 뿐만아니라 심지어 형상이 그때마다 질료의 종류와 선택까지도 낱낱이 예시하며 규정한다. 그 결과 이러한 용도성은 존재자에게 나중에 부여되고 첨가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존재자 위에 군림하는 어떤 초월한 목적과도 같은 그런것이 결코 아니다. 용도성이란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자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 현존하게 됨으로써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그런 특징이다. 용도성이란 개념아래 종속되는 이러한 존재자는 언제나 제작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산물은 언제나 '어떤것을 하기 위한 도구'로서 제작된다. 그러므로 존재자를 규정하는 개념으로서의 질료와 형상은 도구의 본질 속에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다. 도구는 인간의 손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술 작품과 유사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예술작품은 도구와는 달리 자족적으로 현존한다 (selbstgenugsames Aanwesen)는 점에서 자생적이며 무목적 성격을 갖는 사물과 단순한유사성을 갖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도구는 사물과 작품 사이에 자기만의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사물성을 규정하는 지금까지 거론된 세가지 규정방식은 사물을 '특징들의 담지자'로서, '감각의 다양성의 통일'로서, 그리고 '형상화된 질료'로서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이런 사고방식이 존재자를 직접적 경험에 앞서 선취됨으로서 지배적인 사물개념들은 사물의 사물적 성격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도구의 도구적 성격 그리고 심지어 작품의 작품적 성격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서 차단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물에 대한 해석들가운데 질료와 형상을 실마리로 삼아 행해진 사물 해석이 특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구의 도구 존재를 해석하는 가운데 비롯된 것으로서 도구(Zeug)는 우리 자신의 제작 활동(Erzeugen)을 통해 도구 자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눈짓에 따라 우선 도구의 도구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일상적 도구의 한 예로,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을 택하기로 하겠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신발을 여러차례 그린 적이 있는 반 고흐(van Gogh)의 잘 알려진 유화 한 폭을 택하기로 하겠다. 신발은 신기 위한 도구이다. 도구의 존재는 용도성 안에 존립한다. 용도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사용되는 도구의 쓰임새에서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밭일을 하는 아낙네는 신발을 신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비로소 신발은 신발 자신의 본질로 존재한다. 이러한 도구사용의 과정에서 우리는 도구적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반해 우리가 한켤레의 신발을 단지 일반적으로 눈앞에 떠올려 보거나, 혹은 심지어 단지 그림 속에 막연히 놓여있는 사용되지 않는 신발을 쳐다보는 한, 우리는 도구의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 결코 경험 할 수 없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서는, 심지어 이 신발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너무 오래 신어서 가죽이 늘어나 버린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밭일을 나선 고단한 발걸음이 엿보인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수수하고도 질긴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드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강인함이 배어있고, 신발 가죽위에는 기름진 땅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으며, 신발 바닥으로는 저물어가는 돌길의 고독함이 밀려온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 가운데에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이 외쳐오는듯 하고, 잘익은 곡식을 조용히 선사해주는 대지의 베풀음이 느껴지기도 하며, 또 겨울 들녘의 슬슬한 휴경지에 감도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도구에서는, 빵을 확보하기위한 불평없는 근심과, 고난을 이겨낸후에 오는 말없는 기쁨과 출산이 임박해서 겪어야 했던 아픔과 죽음의 위협앞에서 떨리는 전율이 느껴진다. 이 도구는 대지(Erde)에 속해 있으며, 농촌 아낙네의 세계(Welt)속에 포근히 감싸인채 존재한다. 이렇듯 포근히 감싸인 채 귀속함(das behute Zugenhoren)으로서 그 결과 도구 자체는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무르게(Insichruhen)된다 .이렇듯 용도성 자체는 도구의 어떤 본질적 존재의 충만함 속에 평안히 머물러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뢰성이라고 부른다. 도구의 도구존재, 즉 신뢰성은 모든 사물을 그때마다 그 자신의 방식과 범위(Weite)에 따라 자기 안에 모아 들인다. 그러나 도구의 용도성은 단지 이러한 신뢰성의 본질적 결과일뿐, 신뢰성이 소실된 이후에는 적나라한 용도성이 돋보일 뿐이다. 이러한 용도성은, 마치 도구의 근원이 질료(재료)에 형상(형태)를 부여하는 단순한 제작행위에 있는 듯한 그런 생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도구는 더욱 넓고도 깊은 참다운 도구 존재 속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질료와 형상, 그리고 이 양자의 차이도 실은 더욱 깊은 근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안에 고요히 머무르고 있는 도구의 이러한 고요(Ruhe,평안)는 신뢰성 속에 존립한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작품의 작품존재에 대해 어렴풋하게 무엇인가를 느끼게된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앞에 가까이 다가섬으로서 우리는 작품과 가까이 할때, 우리가 일상적으로 있던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더불어 이를 통해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고 오직 작품속에서만 도구의 도구 존재는 고유하게 나타난다. 반 고흐의 그림은 도구, 즉 한 켤레의 농촌 아낙네의 신발이 진실로 무엇으로 존재하는지(was ist) 를 밝혀주고 있다. 신발이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의 비은폐성 가운데로 나타난(heraustreten)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존재자의 비은폐성(Unwerborgenhert,환히 드러나 있음)을 알레테이아라고 불렀다. 만일 작품속에서 '존재자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열어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면, 작품속에는 진리의 어떤 일어남(ein Geschehen der Wahrheit)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 속에서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다.(sich-ins-Werk-setzen) 그렇다고 한다면, 예술의ㅡ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음'(das Sich-ins 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n)이다.
그러나 '예술은 진리가 작품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라는 이 명제는 혹시 '예술은 현실적인 것을 모방하여 묘사하는 것'이라는 저 오래된 견해를 되살리려는 것은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작품 속에서는, 그때그떄 눈앞에 현존하는 개별적 존재자를 재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보편적 본질을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서 결과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할 때에만 비로소 작품의 성격, 도구의 도구적 성격, 그리고 사물의 사물적 성격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통찰 할 수 있는 우리의 시선이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술작품은 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놓는다(eroffnen). 작품속에서는 이러한 열어놓음이, 탈 은폐함이, 다시 말해 존재자의 진리가 일어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속을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음이다.
Vincent Willem Van Gogh
Oil on canvas. 1886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lands)
작품의 주제로서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 구두는 더이상 그 용도성으로서의 기능이 폐기되어진다. 단지 화가가 보여주길 원하는 목적의 비은폐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서 작품이라는 새로운 도구의 용도성으로 새롭게 나타내어진다. 그러면서 작품안에서는 도구로서의 어떤 본질적 충만함이 내재하며 - 이를 신뢰성이라 한다 - 작품속에는 진리의 어떤 일어남이 작용하게 된다. 반 고흐의 그림은 도구, 즉 한 켤레의 농촌 아낙네의 신발의 진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예술 작품은 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놓는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열어놓음이, 탈 은폐함이, 다시말해 존재자의 진리가 일어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속을 스스로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진리가 작품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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