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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미학 - 90년대의 예술

louis... 2015. 6. 17. 19:12

관계의 미학 - 90년대의 예술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1965 ~ )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이론가. 2000년에서 2006년까지 제롬 상스와 파리의 팔레드 도쿄의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프랑스 문화부의 예술창작 감독기관장을 맡고 있다. 니꼴라 부리요는 1990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리옹비엔날레등 유럽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하는 동시에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면서, 현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유럽의 큐레이터로 자리 잡았다. 저서로는 <관계의 미학Esthetique relatiannelle>,<형태의 삶 Formes de vie, Une genealogie de la modernite>,<포스트프로덕션 Postproduction>,<래디컨트Radicant>등이 있다.

 

참여와 전이성

플럭서스Fluxus의 해프닝과 퍼포먼스에 의해 이론화된 관객의 "참여"는 예술적 실천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 전체에서 상호작용이 차지하는 부분은 양적으로 크게 증가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터넷망과 멀티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새로운 상생 공간을 창조하고 문화적 대상에 직면해 새로운 유형의 교류를 시작하려는 집단적 욕망을 보여준다.

전이성은 이 세계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것은 예술 작품의 구체적인 속성을 구성한다. 전이성이 없는 작품은 관조에 의해 짓눌린 오브제와 다름 없다. 들라크루아는 그의 일기에서 "성공한 회화란 관객의 시선으로 되살아나고 변화하는 감정을 순간적으로 "응축"한다"고 썼다.

 

전이성이라는 관념은 미학의 영역에 대화가 갖고 잇는 형식적인 무질서를 도입했다. : 그것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추론적 성격과 그 전파에 있어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위하여 특정한 "예술의 장소"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한다.

모든 예술 작품은 관계적 대상으로서, 수많은 상대와 수신자들과 협상의 궤적으로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브르디외는 예술 세계를 "입장position들 사이의 표상적인 관계의 공간", 즉 힘의 관계와 투쟁에 의해 정의되는 소우주로 간주하는데, 그 힘의 관계와 투쟁에 의해 생산자들은 이 소우주를 "보존하거나 변화"시키려 한다. 다른 모든 사회적 장과 마찬가지로 예술 세계는 해석을 허용하는 "상이한 입장들의 체계"를 제시하는 한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라모나쉬 써클(드보르뜨 컬렉션의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술은 고도로 협력적인 체계이다.:구성원들 간의 조밀한 상호 접속망은 그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모든 구성원의 역할 이라는 것을 함의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그들이 "예술이 예술을 하는 것이지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입증할 기회를 주었다. 

역사적 도표를 대략적으로 설명한다면 우선적으로 예술 작품은 스스로를 초월적인 세계에 위치시키기 시작 했으며, 이 초월적 세계 안에서 예술은 신과의 소통 방식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후 예술은 조금씩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이러한 야심을 단념했다. 예술 작품의 이러한 운명은 큐비즘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재검토 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의해 시작된 관계의 영역은 점진적으로 더욱더 제한된 대상들에 적용되었다.

 

본질적으로 미술사는 외적 관계의 연속적인 장들의 역사로서 이해될 수 있는데, 이 외적 관계의 장은 내적 변화에 의해 결정되는 실천으로 연속된다. : 세계와 맺는 관계가 특정한 실천과 대상이 층에 의해 매개되는 바 그대로, 미술사는 세계와의 관계를 생산하는 관계 생산의 역사이다. 인류와 신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류와 대상들의 관계의 영역에 몰두하던 역사적 시기가 지나고,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예술적 실천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예술은 이제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영역에 몰두한다. 이러한 특정한 생산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실천적인 장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적 영역들을 결정한다. 니꼴라 부리오는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관계적인 특성을 넘어 인간 관계들의 영역을 지시하는 형상들이 이제 완전한 자격을 가진 예술적 "형태"가 됨을 말하고 있다. : 집회,만남, 시위,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유형의 협력, 게임, 파티, 연회의 장소, 등 만남과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들 전체가 오늘날 그 자체로서 탐구될 수 있는 미학적 대상의 전형이라고 그는 말한다.

 

유영학 - 접속과 만남의 약속

회화나 조각은 경험적으로 상징적인 가용성disponibilite*(원하는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어서 사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하고 정시적인 유연성, 개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퍼포먼스와 같이 특정한 시간에만 접할 수 있는 예술이 갖는 성질에 반하여, 관객이 원한다면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개방성과 소비가능성을 의미한다.) 에 이해 특징 지어진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현대미술은 정해진 시간에만 보도록 되어있는 비가용성의 특징을 띄고 있다. 가장 고전적인 예가 퍼포먼스이다. 한마디로 예술 작품은 스스로의 고유한 시간을 운용하면서 만남을 야기하고, 만남의 약속을 제안한다. 그러난 그것이 반드시 대중과의 만남들에 관한 것은 아니다. : 마르셀 뒤샹 - "예술과의 만남의 약속", 로버트 베리,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온카와라의 전보

 

상생과 만남

예술작품은 어는 정도의 불확실성을 포함하는 관계적 장치로서 기능할 수 도 있고,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만남을 야기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계로서 기능할 수 도 있다. 브라코 디미트리예빅 - <우연히 지나가는 행인>, 스테픈 윌랫츠, 소피 칼, 온카와라의 <내가 만나다> 시리즈, 고든 마타 클락<푸드>, 다니엘 스포에리<저녁 식사들>,: 새로움에 특원을 부여하고 언어에 의한 전복을 요했던 과거 모더니스트 문화가 예술 세계의 내적 관계에 역점을 두었다면 "스펙터클의 사회"의 편린 앞에서 저항하고, 절충주의적 문화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오늘날 예술의 강조점은 예술 작품의 외적 관계에 놓여졌다.사회적 유토피아와 혁명적 희망은 일상의 마이크로- 유토피아와 모방의전략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30년전에 펠릭스 가타리는 오늘날 예술적 실천의 기반을 세운 근거리 전략들을 격찬했다. : "나는 사회의 점차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아주 미소한 시도들, 커뮤니티 형태, 도시구역 위원회, 대학 내 어린이 집의 조직들등등이 매우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제 현대 예술의 전복적이고 비평적인 기능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탈 경로의 창조와 일시적이고 유목적인 구성안에서 실현되는데, 예술가는 이를 통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모델화하고 전파한다. 조지나 스타 <레스터랑>, 벤킨몬트, 링컨 토비어, 필립 파레노,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패널티 에이리어>, 헤미오 조베르니그<단일 개체>, 더글라스 고든, 이처럼 관계의식을 창조하거나 탐색하는 작품들은 현댜 "사회체"의 조밀한 층 안에서 관계적 소영토들을 이룬다.

 

협력과 계약

사회성의 순간들 혹은 사회성의 생산적인 대상들을 예술 작품으로 제안하는 작가들 역시 생사의 원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미리 정의된 관계적 틀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예술가와 갤러리스트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탐구는 일종의 형태와 프로젝트를 결정할 수 있다. 도미니끄 곤잘레스-포에스터의 <당신이 보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환영합니다>(1988), <도교주의자의 딸>등을 통해 곤잘레스-포에스터는 이렇게 한사람을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역사에 포함시키거나 상호적으로 침투하게 함으로써, 갤러리스트와 "그의" 예술가를 이어주는 암묵적인 계약을 탐구 했다. 마우리치오 카틀란, 엠마뉴엘 페로탱, 스테파노 바질리코, 샘새무어등..여기에서 예술가들은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 즉 그를 선재하는 형태를 생산하는 세계들에 개입한다.

 

직업적 관계들 : 손님들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는 다양한 실천들은 선재하는 관계의 유형들에 관련되는데, 예술가는 이 선재하는 유형들에서 형태를 이끌어내기 위해 개입한다. 예술가는 서비스와 상품을 생산하는 현실의 장안에서 행동하고, 예술적 실천의 공간에서 그가 제시하는 대상들의 사용 기능과 미학적 기능 사이의 모호함을 창시하는 것을 노린다. 니꼴라 부리오는 피터 펜드, 마크 디온, 니엑 반 데스티그, 인골드 에어라인과 프레미아타 디타와 같은 조금씩 패러디적인 "기업"들을 의도적으로 공략하면서, 실행적 리얼리즘이라는 명명하에 정립시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사용 기능과 함께 일어나는 관조의 동요라고 이야기 했다. 이 예술가들이 공통점으로 갖는 것은 직업적 활동에서 유래하는 관계적인 세계와 함께 예술적 생산의 장치로서 직업적 활동을 모델화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서비스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는 사회적 관계에 생긴 균열을 메운다. 형태는 이제 진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이 예술가들은 예술 세계의 내부에서 그와는 이질적인 "세계들"의 매개 변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고객, 주문, 기획의 개념들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적 세계를 예술 세계에 도입했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끊임없이 "주어진 조건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오브제의 제작을 지배하는 초기의 희망"을 되찾는 것일 수 있다.

 

갤러리를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

갤러리나 미술관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사이의 교환 역시 예술적 작업을 위해 가공되지 않은 재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많은 경우 전시의 오프닝은 이상적인 관객 왕래의 모델로서 전시 장치의 일부를 구성한다. 머지 않아 전시 과정 자체가 예술가에 의해 "점유"될 것이다. 트리스탄 짜라가 "생각은 입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던 것처럼 예술은 갤러리 안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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