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Writing/예술이란...

관계의 미학 - 동존同存과 가용성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이론적 유산

louis... 2015. 7. 3. 00:59

관계의 미학 / 니꼴라 부리오 Nicolas Bourriaud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1965 ~ )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이론가2000년에서 2006년까지 제롬 상스와 파리의 팔레드 도쿄의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프랑스 문화부의 예술창작 감독기관장을 맡고 있다. 니꼴라 부리요는 1990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리옹비엔날레등 유럽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하는 동시에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면서, 현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유럽의 큐레이터로 자리 잡았다. 저서로는 <관계의 미학Esthetique relatiannelle>,<형태의 삶 Formes de vie, Une genealogie de la modernite>,<포스트프로덕션 Postproduction>,<래디컨트Radicant>등이 있다.

 

관계의 미학 - 동존同存과 가용성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이론적 유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파란 거울)>은 일종의 "퍼포먼스"도 포스터의 배포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형태와 밀도를 갖춘 하나의 예술 작품에 관한 것이다. , 그것은 구축(또는 분해)의 과정이 아니라 관객들 사이에서 그 현존의 형태를 전시하는 예술 작품이다. 곤잘레스-토레스가 작품을 연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의 가용성, 즉 상생의 선물에 대한 문제 의식은 오늘날 의미를 만드는 데 토대가 된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현대 미학의 중심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사물과 맺는 관계의 본질에까지 이르게 된다.

 

동거의 패러다임으로서의 동성애

오늘날 우리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를 평가하듯이 그의 작업을 신형주의적neo-formaliste문제제기나 동성애에 대한 행동주의자적인 노선으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매우 안일한 태도일 수 있다. 그의 힘은 인간 경험의 중심에서 감동을 주기 위해 형태를 도구화하는 능숙함과 동시에 공동체적 획일화를 벗어나는 능력에 있다. 그에게 동성애는 논증적 주제이기보다는 감정적 차원인 예술 형태들의 창조적인 삶이 갖는 한 형태를 상징한다. 곤잘레스-토레스에게 있어 동성애는 공동체적 자기 표명에 갖혀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공유할 수 있고, 각 개인이 동화될 수 있는 삶의 모델이 된다. 게다가 그것은 특히, 그의 작품에서 대립없는 이중성으로 특징 지어지는 특유의 형태의 장을 발생시켰다. "2"라는 숫자가 그것인데, 곤잘레스-토레스 미학의 기본 단위는 둘이다. 고독의 감정은 결코 "1"에 의해서가 아니라"2"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술사의 고전적인 형상인 커플을 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된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커플은 타원처럼 고요하며 이중적인 개체로 특징 지어진다. (무제(Double Portrait)>,1991). 그의 작품의 형식적 구조는 자신안에 타인을 내포하는 조화로운 등가성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끊임없이 굴절하면서 그의 주요한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이 예술가가 자신의 삶에대해 던졌던 많은 암시들로 인해 그의 작업을 자전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일은 매혹적일 것이다. 곤잘레스 토레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커플의 이야기, 즉 일종의 동거cohabitation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구나 작품은 사람하는 사람들 사이의 동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상들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볼때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은 분명히 자전적인 프로젝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명이 공유하는 하나의 자서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쿠바의 예술가는 다음 10년까지 예술가들이 가장 흥미롭게 탐구하게 될 바로 그 공간, 즉 상호 주체성에 기초한 공간을 예시했다. 그 이후의 예술가들은 무엇이 되었든 각자 개인적인 문제를 발전시키면서 작업의 개념과 확산의 차원에서 인간관계의 공간에 부여하는 우선권이라는 공동의 영토를 발견한다(그들은 인간의 상호적인 관계에대한 생산의 방식들을 연계적으로 구성한다). 그 대표적인 예술가로서 도미니끄 곤잘레스-포헤스터와 호르헤 파르도를 손꼽을 수 있다. 특히 곤잘레스-포에스터와 파르도 모두 그들 관심의 중심에는 색이있다. : 우리는 자주 그 색채의 부드러움을 통해 곤잘레스-토레스의 "양식"을 알아본다.

 

타인을 내포한다는 개념은 단순히 하나의주제를 이루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작업의 형식적인 이해에도 매우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곤잘레스-토레스가 계속하여 끈질기게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어떻게 너의 현실에서 살 수 있을까?" 또는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 어떻게 양 측면에서 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이다. 이처럼 60년대 예술의 구조에 예술가의 사적이고 은밀한 세계를 주입시킨 것은 새로운 상황들을창출했고, 예술에 대한 해석을 덜 형식주의적이면서 보다 더 심리주의적인 성찰로 소급해 전화하게 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곤잘레스-토레스가 목표로한 융합의 지평에 있다. 조화와 동거에의 이 요구는 미술사와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기념비의 현대적 형태 

"예술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 모든 사물들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현실에 다름아닌 카오스의 중심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생산하는 능력에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과정과 상황을 전시하는것을 보면서 근심에 잠긴다. 그들은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보이는 "너무 개념적인" 측면에 대해 불평한다. 그런데 90년대 예술의 이 상대적인 비물질성은 미학적 행동주의나 오브제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매너리즘적인 거부에의해 초래되고 고취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브제, 즉 의미로 이끄는 과정을 전시하고 탐색한다. 필립 파레노가 설명한 것처럼 오브제는 전시의 과정에 있어 "해피엔드"일 뿐이다. 그것은 "바라본다"라고 하는 회화의 관습적인 지속과는 필연적으로 다른 고유한 지속을 전시에 돌려줌으로써 일어났다. 현대의 예술 작품은 꼬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표현처럼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심연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면서 의미를 창조하는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펠리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러한 야심의 표본처럼 생각된다. 그는 그의 작업을 가장 미세한 감정들의 잔재와 지속적 시간에 대한 첨예한 의식안에 뿌리 내리게 했다. : 생산의 방식에 대한 주의깊음과 실천은 교류와 공유의 이론에 중심축을 두었다. : 행동주의, 그는 참여예술의 새로운 형태를 추진했다: 동성애, 그는 삶의 방식을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의 표현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예술에서 물질화 과정의 문제와 물질화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현대인들의 시선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사건들의 기념, 기억의 영속성, 만져지지 않는것의 물질화와 같은 기념비적인 것의 상이한 면모들에 따라 접근하기까지 하는 등 그것을 가장 민감한 측면으로 다루기에 이른다. 대체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사적인 기억들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는 현수막과 벽화 형식으로 실현된 초상은 탁월한 형태안에서 한 개인과 그의 시대의 결합이라는 기념비의가장 중요한 기능을 충족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형태의 양식화는 곤잘레스-토레스가 연상되는 사건의 중요성, 그것의 복잡성와 심각성, 그것을 연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형태의 미니멀한 특성 사이에서 창출하는 끊임없는 대비 속에서 더욱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곤잘레스-토레는 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에 띄워보낸 유리병과 암호화된 메시지처럼 사실들을 형태안에 기재한다. 여기에서 기억은 인간의 몸이 격는 것과 유사한 추상의 과정을 겪는다.

 

공존의 표지( 예술 작품과 개인 )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은 협상과 동거를 구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확보한다. 그것은 관객의 윤리 역시 포함한다. 그의 작품 <캔디 피이스>는 외적으로는 하찮은 형태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에게 있어 척도의 의미와 예술작품과 맺는 관계의 특성같은 문제들..

 

작품이 교류에 기초한 감각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작품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어떠한 현실이든 그것에 대한 평가의 근거들과 유사한 기준을 따라야만 한다. 오늘날 예술적 경험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작품 앞 관객의 현전이다. 예술작품앞에서 우리가 제기해야만 할 첫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예술 작품은 나에게 그 앞에 존재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혹은 그 역으로 작품의 구조안에 타자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는가? 작품에 의해 묘사되거나 제시되고, 그것을 지배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 시-공간은 실제적인 삶에서의 나의 열망에 부합되는가? 그것은 비판받을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비평하는가? 나는 현실에서 그와 동일한 시-공간 안에 살 수 있을 것인가? 이질문들은 예술에 대해 과도하게 의인법을 사용하는 관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인간적인 관점을 재고하게 한다. 오늘날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만한 예술 작품은 틈으로서 기능하는 것들, 즉 관객 경영과 관련된 현재의 규범들을 넘어선 경제체계에 의해 지배되는 시-공간으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다. 곤잘레스- 토레스나 오늘날 안젤라 블로흐, 카르슈엔 휠러, 가브리엘 오로즈코 또는 피에르 위그와 같은 예술가들과 마주하게 되는 전시의 상황들은 관객에 대한 생산자의 어떠한 선험적인 우선권도 확립하지 않을뿐 아니라 미리 결정되지 않은 개방된 관계를 관객과 협상하는 형태들을 통해 관객 각자에게"그들의 기회를 남겨두려는" 고민으로 지배된다. 우리는 태도가 형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형태가 사회성의 모델을 유발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더미에서처럼, 형태와 계획된 소멸 사이, 시각적 미와 행동의 소박함 사이, 그리고 이미지 앞에서의 아이같은 경탄과 해석의 층위들의 복합성 사이에 이상적인 균형이 존재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관객을 향해 이동했다.

링컨 토비어, 벤 킨몬트, 안드레아 지텔 등에서 보여지는 오늘날의 예술은 작업의 과정안에 그것을 수용할 마이크로 커뮤니티의 micro-communaute의 현존을 고려한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자신의 생산방식 내부에서 그 길과 그것이 전시되는 순간, 응시자-참여자들의 순간적인 공동체를 창조한다. 그의 작품 <무제(Arena)>의 경우 예술가는 "응시자"가 일종의 장치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살아나게 하며, 작업을 완성하고, 그 의미의 전개에 참여하도록 자극한다. 이 망막적인 "참여"가 바로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이라는 제목으로 고발한 것인데 물론 이는 미니멀 아트에서 그 창작의 원천을 취한것은 맞지만 여기 이 작품에서는 더이상 단순한 망막적인 지각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관람자가 작품에 기여하는 것은 그의 몸 전체, 그의 역사, 그리고 그의 태도이지 더 이상 추상적인 신체적 현존이 아니다. 미니멀 아트의 공간은 시선과 작품 사이를 분리하는 거리 안에서 구축되었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이 규정하는 공간은 미니멀 아트와 비교할 만한 형식적 방법으로 상호 주체성 안에서, 즉 작품이 제안하는 경험에 대해 관람자가 응하는 감정적이고 행동주의적이며 역사적인 대답안에서 전개된다.

 

오늘날 우리는 막연하게 전통적인 아우라의 귀환을 열망한다. 우리는 현대의 개인주의를 비난할 만한 충분한 언어를 갖지 못한다. 개별성에는 동의하고 집단의 지배 충동에는 반대해 온 지난 2세기 동안의 투쟁이후, 현재에는 새로운 통합을 실행해야만 한다. 모더니티에서 비롯된 현대의 문화를 위해 다수의 개념을 다시 환원시키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제한된 집단적 제도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티가 우리에게 남긴 투쟁을 넘어섬으로써만 모더니티를 우리에게 유익하게 연장할 수 있다. 이제 예술적 아우라인 "멀리있는 것의 유일한 현전"이 관객에 의해 제공되는 것처럼: 이미지 앞에서 재규합되는 마이크로 커뮤니티가 아우라의 원천 그 자체이며 그 권위를 관객에게 위임한 예술 작품을 후광으로 둘러싸기 위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멀리 있는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술의 아우라는 작품 앞에서, 작품이 스스로를 전시하면서 산출하는 일시적 집단 형태의 한가운데서 나타난다. 현대미술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부정하지 않는 반면 그 기원과 효과를 이동시킨다는 의미에서 모던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실행한다. 현대 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이다.

 

해결책으로서의 미?

곤잘레스-토레스에게서 우리는 미적인 열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단순성, 즉 일종의 형식적인 조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이다. 말하자면 시각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덕목인 무한한 섬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과한 표현도어떤 효과에 대한 최소한의 반복적인 강조도 결코없다. 그의 작품은 눈도 감정도 공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함축적이고 조심스러우며 유동적이다. 그는 끊임없이 상투적인 이미지를 모호하게 이용하지만, 그것은 그의 손 안에서 되살아난다. 곤잘레스 토레스는 무의식적 감정에 호소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감정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거들이다. 무엇을 향해 감정을 이끄는가, 예술가는 감정들 사이에서 그것을 어떻게, 어떤 의도로 조작하는가?

 

www.youtube.com/channel/UCsL-txmMzwHZypmcSb0jpYA?view_as=subscri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