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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죽음 /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louis... 2015. 12. 21. 23:36

저자의 죽음 /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롤랑 바르트(1915. 11 ~ 1980. 3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비평가로서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1952년 파리의 국립 과학 연구소이 연구원이 되었다. 근대문학의 형성을 다룬 1953<글쓰기의 영도>, 1957년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기고문을 모아 엮은 <신화론>을 썼다. 1976년에 콜레쥬 드 프랑스의 문학 기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바르트의 다방면의 작품들은 고유한 발전과 현실적 위치를 끊임없이 성찰한 결과들이다.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롤랑 바르트는 발자크의 중편소설 < 사라진느>의 문장을 예로 들며 본 논고를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는 인간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중성적이고 복합체적이며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 (여기서 말하는 음화는 글쓰기안에서의 주체의 부재와 그 전복적인 양상을 말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란 인간이 인격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생산된 현대적인 인물을 말한다. 지금까지 보들레르, 고흐, 차이코프스키등의 작품을 보듯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이는 언제나 하나의 유일하고도 동일한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몇몇 작가들이 이를 붕괴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르트는 말라르메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말라르메의 모든 시학은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이후 발레리, 프루스트, 특히 푸르스트는 화자를 보고 느끼고 쓰는 자가 아니라 이제 글을 쓰려고 하는 자로 만들었다. 푸르스트는 현대적인 글쓰기에 그 서사시를 부여했으며 근본적인 뒤집음에 의해 그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그의 삶을 소설속에 투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그가 쓰는 책이 그 작품의 모델이 되는 그러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선사시대적 초현실주의 형식을 띄었던 이 시기를 지나 보내고 곧 돌발비약과 자동기술적 형식의 완성은 저자의 이미지를 탈 신성화하는데 공헌하였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마치 ''''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저자의 멀어짐<거리두기>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 혹은 글쓰기의 행위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인 글쓰기를 완전히 변모시킨다. 시간도 더이상 같은 시간이 아니고, 책과 저자는 동일선상에 위치하며 궁극적으로 현대적인 필사자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작품에는 단지 언술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 진다.

 

이제 텍스트는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짜임이다. 작가가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가 <번역하고자>하는 내적인 <>은 그 자체로서 이미 만들어진 사전일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전 안에서 낱말들은 다른 낱말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있으며, 또 그것은 무한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모험의 대표적인 사례를 토머스 드 퀸시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이제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부터 멈출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되고 모방일 뿐이다라고 롤랑 바르트는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 비평은 작품아래에서 저자를 발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비평의 통치였으며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의 복수태안에서 모든것은 풀어나가야(demeler)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echiffer)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은 것이 아니며 글쓰기는 끝없이 의미를 상정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증발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롤랑 바르트는 발자크의 문장을 예를 들며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며, 그 진정한 장소는 글읽기라고 이야기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류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이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이 목적지는 더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 는 없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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